"찍소리 말고 하라는 대로 해!"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저에게 매우 억압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정작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본인이
억압하는 게 아니라 '엄한 편'이라고 합니다.
과연 엄한 것과 억압적인 것이 같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엄한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지켜야 하는
규칙이나 행동 규범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규칙과 규범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허락된 테두리를 벗어나면
지적하고 책임을 추궁하지만, 테두리 내에서는
상당한 자율권을 보장합니다. 그래서 엄한 태도에는
아이를 존중하고 책임감과 판단력 있는 성숙한 존재로
키워주고 싶은 진정한 관심과 돌봄이 깃들어 있습니다.
정서적 금수저가 번창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며
보금자리입니다.
반면에 억압적인 경우 아이가 지켜야 하는
규칙은 바로 어른 자체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새로운 규칙이 생겨납니다.
충분한 예고 없이 규칙이 발표되고, 명쾌한 설명 없이
적용됩니다. 그리고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가 갑자기 지적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걸리는 사람이 재수 없는 것이고
걸리면 그저 억울합니다.
어른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까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유연하게 적용했을 겁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소통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납득할 수 없다면, 아이들은 어른이 시키는 것을
군소리 없이 무조건 따라야 하는 노예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적절하고 부적절한지, 판단력을 키울 기회를
박탈당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엄함과 억압은 얼핏 보면 비슷해 보입니다.
원칙과 규칙이 존재한다는게 같고 위반하면
벌을 준다는 것이 같습니다. 그래서 혼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은 확연히 다릅니다. 엄함에는 사랑과 존중,
가르침이 있습니다. 억압에는 혐오와 멸시,
가리킴만 있습니다.
엄함에는 배움이 있고 인재를 탄생시킵니다.
억압은 증오를 대물림할 뿐입니다.
정서적 흙수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아이가 어릴 떄는때는 엄하게 키우다가,
사춘기에 접어들면 허락된 행동의 범위를
넓혀가야 합니다. 사춘기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분리해 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많은 부모들이 정반대로 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의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해도 내버려 둡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시작되는 무렵
아이를 '잡기' 시작합니다.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다가 갑자기 우리에 갇히거나
심지어 올무에 걸린 기분일 것입니다.
숨통을 쥐어오는 답답함에 우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부모는 공부가 먼저라고 아이를 몰아붙입니다.
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이에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애착은 집착이 아닙니다.
애착은 사랑이고, 집착은 사유(私有)이고 소유욕입니다.
저희가 제안하는 원칙은 단 두 가지입니다.
'남을 해치는 행동은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을 해치는 행동은 안 된다.'
세부적인 규칙은 아이의 나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유아기에는 'TV를 한 시간 보면 반드시
밖에 나가서 운동을 한 시간 해야 한다' '해가 지면
밖에서 놀지 않는다' 등 수많은 사항들이 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면 '친구 집에 놀러 가기 전에는
사전에 통보한다'로 바꿔서 허용의 범위를 넓혀줍니다.
어른은 아이에게 엄한 존재가 되어야지,
폭군이나 지배자가 되면 안됩니다.
엄함은 가정과 학교의 생활방식입니다.
억압은 교도소의 방식입니다. 학교와 가정이
억압하는 것이 아닌 엄한 보금자리여야
아이들이 자율성과 자발성이 조화를 이루는
정서적 금수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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