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가 얼마나 힘이 없는지 엄마들은 잘 안다. 그런 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초등학생 아들딸이 있는 젊은 엄마가 매일 반복하는 잔소리 없이 아이들과 잘 지내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다고 하소연한다.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나 책을 봐도 같은 말을 두 번 하면 벌써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되고, 교육 효과가 전혀 없다고 하니 걱정이란다. 그래서 '절대 잔소리하지 말아야지' 하고 매일 결심하지만, 또다시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고 한다. 아마도 이 엄마만이 아닐 듯하다. 긴 이야기 끝에 그 엄마의 잔소리가 친정어머니의 말 습관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에게 딸인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깎아내려서 속상했단다. 자식 자랑을 하면 몇 가지 바보 가운데 하나라고 여긴 우리 문화의 습속 탓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그 엄마는 어머니가 자신을 흡족해하지 않는다고 받아들여 '내가 뭘 해도 엄마는 잘했다고 한 적이 없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신임받지 못하니, 커가면서도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도 누구나 '기본'은 해야 한다는 점에만 민감해졌다. 아, 이 '기본'이라는 말이 얼마나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인가! 우리는 흔히 누구나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해내야 하는 '기본'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기본을 지키기 위해 숙제, 공부, 몸 청결, 정리 정돈, 규칙 지키기, 친구들과 다투지 않기 등등 해야 할 '일' 중심으로 자녀에게 강요한다. 그 엄마의 맏이는 그 방침에 따라 일(공부) 중심의 아이로 자랐다. 당연히 그렇게 단련될 때까지 엄마의 잔소리는 쉬지 않았다. 그것은 친정어머니가 딸을 두고 못마땅한 표현만 하셨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어머니가 딸을 믿지 않았듯이, 자신도 아이를 믿지 못하는 엄마로 대를 이어 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첫째 아이는 도리 없이 엄마 말대로 '해야 할 중심'의 아이로 자랐다. 그러나 둘째는 첫째의 재미없는 모습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알아서 할 테니 잔소리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다. 어른들 틈에서 힘없는 존재로 어른의 기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첫쨰와는 달리, 기준이 느슨해진 덕에 다른 짓 할 여지가 있었다. 그래도 엄마는 자녀에 대한 믿음이 없어 둘째에게도 자꾸 쓸데없는 잔소리를 했다. 둘째 아이는 귀를 닫고 별 영향을 받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사춘기를 맞은 첫째 아이가 요즘 엄마의 잔소리에 반항해 괴롭단다. 큰아이는 자신의 기준에는 잘한 시험 점수도 엄마의 기준에 미달하여 매를 맞곤 했다. 그러나 훗날 같은 상황에서 동생이 별 야단을 맞지 않는 것을 보고는 동생을 향해 질투심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첫째 아이는 엄마가 동생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동생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결국 형제들 사이의 우애까지 엄마가 방해한 셈이다. 엄마가 자녀 각각과의 관계에 치우치게 되면, 형제 사이의 관계를 보살필 겨를이 없어 문제가 발생한다. 자녀의 사정을 못 보고 엄마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잔소리이다. 그래서 엄마가 잔소리할 때는 아이와 함께 마주 보고 있어도, 엄마 혼자 떠드는 공허한 외침이 될 수밖에 없다. 아이의 방식을 인정하고 믿어주면 엄마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잔소리하지 않아도 되고, 잔소리 듣지 않아도 되는 엄마와 자녀의 관계를 즐길 수 있다. 엄마의 "이래라 저래라"하는 지시에 따라 자녀가 경직되어 의무감만 안고 재미없게 살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서 엄마 자신의 느낌이 살아나고 아이에게 생동감 있는 느낌을 살려줄 수 있다. 그야말로 '즐거운 나의 집'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가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자신과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의 보이지 않는 실체를 놓치고 있는 듯하다. 옆집 아이와 비교하여 내 아이가 가진 다른 면을 소중한 줄도 모르고, 아깝게 흘려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언제나 평균 키와 평균 몸무게로 비교하면서 내 아이를 재려 하지 않았는가. 첫 이가 언제 나고, 낯가림을 언제 하고, 뒤집기를 혹시 늦게 하지 않는지 얼마나 신경을 쓰는가? 조기교육이 아이의 생사를 가른다는 듯, 아이를 '성취'의 무대에 올려놓고 흔들어대기 시작하면 무서워진다. 이때부터 점수와 등수로만 자녀를 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녀의 창백한 표정, 떨리는 손, 비정상적인 체온, 식은땀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면 아이는 마음을 알아주는 부모를 잃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되는 것이다. 엄마는 자녀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도, 억울한 처지에 두어서도 안 된다. 아이에게는 아름답고 활기찬 총천연색의 삶을 살 권리가 있다. 그런데 아이가 마음의 영역이 없는 듯 무시하고 외면하도록 기르는 것은, 그 모든 느낌의 색깔을 지워버리고 흑백의 세상을 살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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